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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고향

『스토너』—고요 속에 잠긴 존엄, 그 잔향을 따라

by green-saem 2025. 6. 14.

스토너

『스토너』

1965년, 미국 작가 존 윌리엄스는 소설 한 편을 세상에 내놓았다. 제목은 『스토너』. 출간 당시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수십 년이 흐른 뒤, 책은 은밀히 번져 나가 세계 독자들의 마음에 뿌리내렸다. 드라마틱한 사건 하나 없이 한 남자의 조용한 일생을 좇을 뿐인데, 문장마다 삶의 의미·고독의 무게·신념과 사랑의 본질이 스며 있다.

이 글은 그 울림을 따라가며, 내가 가슴에 새긴 장면·감정·잔상을 다시 엮은 기록이다. 만약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원전을 직접 펼치고 싶어 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조용하지만 뜨겁게 살아낸 한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 본문 ]

미주리 들녘. 흙먼지와 바람이 낮게 흐르고, 쇠삽이 흙을 찍어 올리는 소리만 들린다. 말없이 밭을 일구는 아버지, 종일 침묵으로 시간을 넘기는 어머니. 스토너는 그 침묵을 삶의 언어로 배운다.

마음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무게—살아간다는 일 자체가 눌어붙어 있다.

그러나 고요한 풍경에도 갈망은 어렴풋이 떠돈다. ‘저 바깥엔 다른 삶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교육 담당자가 찾아와 대학 진학을 권하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더 나은 농사를 지으려면 공부가 필요하다.”
그렇게 소년은 자신이 알던 세계 바깥으로 걸음을 뗀다.

농과대학 강의실, 낯선 언어가 벽돌 사이를 맴돌고, 스토너는 길을 잃은 듯 서성인다. 그러다 필수 과목 ‘영문학 입문’ 수업에 앉는다. 교수가 셰익스피어를 읽어 내려가자, 가슴 한복판이 울린다.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
문장 하나가 사람을 흔드는 경험을 처음 맛본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농학 교재보다 문학 서가 앞에 더 오래 머문다. 시구를 베껴 적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숨이 깊어졌다. 결국 농학 대신 문학을 선택한다. 가족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스토너는 알았다. 지금 멈추면 평생 후회할 것이라는 사실을.

도시 출신 에디스와 급히 청혼하고 결혼한다. 서로 다른 리듬과 기대, 감정 표현 방식이 모래 위 집처럼 흔들린다. 에디스의 극단적 침묵과 격렬한 분노, 스토너의 회피적 고요가 하루하루 균열을 키운다. 딸 그레이스가 태어나도 틈은 메워지지 않는다. 부부는 같은 지붕 아래에서 서로의 그림자만 바라본다.

학내에서도 고립이 깊어진다. 동료 교수 홀리스 로맥스는 스토너의 진지함을 ‘경직된 고집’이라 몰아붙이고, 강의 배정은 구석으로 밀려난다. 그는 낡은 강의실에서 몇 안 되는 학생들에게 묵묵히 문학을 이야기한다. 그 한결같음이 곧 그의 숨이다.

젊은 강사 캐서린 드리스콜이 스토너의 일상에 스며든다. 문학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녀와의 대화는 오래 닫혀 있던 감정을 흔든다. 그는 처음으로 누군가와 진실한 교감을 나누며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소문과 권력, 그리고 에디스의 보이지 않는 압력은 그 관계를 허락하지 않는다. 사랑은 조용히, 하지만 깊은 잔상만 남긴 채 사라진다.

남은 생은 다시 고요하다. 아내와는 형식만 남았고, 딸과의 거리는 멀어졌다. 몸은 쇠약해지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책상 앞을 지킨다. 명예도 부도 잡지 못했으나, 스토너는 안다.
문학을 사랑했기에 살 수 있었다는 것을.
그 사랑이 곧 그의 존엄이었다.

끝맺음 ― 잔잔한 울림의 힘

『스토너』는 거대한 사건 없이도 한 인간의 모든 순간이 얼마나 큰 울림을 전할 수 있는지 증명한다. 소설 속 스토너가, 그리고 이 기록 속 목소리가 들려준다. 위대한 삶은 반드시 요란할 필요가 없다고. 아주 작은 신념, 한 줄 문장, 침묵 속 존엄이 끝내 사람을 살린다고.

책장을 덮은 뒤에도 미묘한 진동이 가시지 않는다. 그 무음의 떨림이야말로 문학이 놓치지 말아야 할 본질이다. 이 글이 당신을 그 떨림 속으로 이끈다면, 여기서 할 일은 모두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