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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고향

파격과 고독의 시인, 이상

by green-saem 2025. 3. 24.

파격과 고독의 시인, 이상 — 「오감도 제1호」 

1. 작품 소개: “13인의 아해(兒孩)가 도로로 질주(疾走)하오.”

이상의 연작시 「오감도」(1934) 중 첫 번째 작품인 「오감도 제1호」는 숫자 13과 아이들(‘아해’), 공포를 반복하는 대사 등을 통해 난해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를 그렸다.

아이들은 흔히 순수와 희망을 상징하지만, 여기서는 끔찍한 공포 속에서 도망치거나 넘어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무섭다고 그리오”라는 문장이 반복되면서 공포가 증폭되고, 길이 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근대인의 절망적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가 주는 가장 큰 충격은 **“가장 지켜져야 할 아이들마저 불안과 공포 속에서 방향 없이 질주한다”**는 비극적 장면이다. 식민지 조선의 시대적 억압과 급격한 도시화 속에서, 누구도 안전하지 않고 어디도 돌아갈 수 없는 근대인의 불안이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다.
아이들은 어디에도 안전하게 머무르지 못하고, 도시 한복판에서 죽음의 그림자에 사로잡힌다.
이러한 파격적 형식과 난해한 서술은 당시 독자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고, 신문 연재가 도중에 중단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감도 제1호

十三인의 아해(兒孩)가 도로(道路)로 질주(疾走)하오
(길을 가다가 깜짝 놀라 돌아보니)

어떤 이는 지르고, 어떤 이는 날고,
어떤 이는 뛰는 듯,
어떤 이는 엎어지는 듯,
어떤 이는 뒤집어지는 듯,
다 겁을 내어 울고 있다오
(그러나 저 뒤의 한 사람은 그래도 웃고 있소)

“제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2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3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13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13인의 아해는 도로 위에서 죽음을 헤매오
(살을 에이는 바람)
길은 집으로 통하지 않고
도로는 도로로만 통할뿐
끝내 누구도 돌아갈 수 없소

이상의 비극적 삶

이상(본명 김해경)은 1910년에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의 혼란 속에서 성장했고 결핵을 앓아 병약한 상태로 글을 쓰는 삶을 이어갔다.
그는 천재적인 관찰력과 수학·기호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독특한 언어 감각을 펼쳤지만, 새로운 문학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과 경제적 곤궁에 시달렸다.
1934년에 신문 지면으로 「오감도」를 연재했으나 혹독한 비난을 받아 중단되었고, 이후에도 생계의 안정 없이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건강과 재정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이듬해 도쿄에서 27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상의 삶은 ‘이해받지 못하는 예술가’의 초상이었다.
급변하는 식민지 조선에서 그는 파격적인 문학으로 새로운 시대 감각을 표현하려 했지만, 병과 궁핍, 사회의 외면이 겹치면서 끝내 비극을 맞았다.그러나 그가 남긴 언어 실험과 난해시의 유산은 훗날 재평가되어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중요 토가 되었다.

마무리

「오감도 제1호」는 이상 문학 세계의 핵심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13명의 아이가 보이는 기괴한 질주와 공포는 식민지 시기와 도시화로 인한 현대인의 불안을 상징하며, 해석을 거듭할수록 예술적 충격이 깊어진다.
이상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 파격과 고독은 시 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모호하면서도 날카로운 언어 속에서, 불안한 시대를 정면으로 마주한 시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